경주 문화유산 한옥마을 즐길거리





역사가 살아있고, 모든 돌과 기념비 사이로 고대의 유산들이 속삭이는 영역으로 들어가세요. 국가의 풍부한 유산의 살아있는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 한국의 도시인 경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고대 신라 왕국의 이전 수도로서, 경주는 천 년에 걸쳐 이어지는 역사적인 경이로움의 보고입니다.

경주 사진

왕족의 울림

경주의 왕궁과 주거지를 돌아보는 그랜저의 모습

경주는 삼국시대에 천년동안 신라의 수도였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57년에 첫 성읍국가인 사로국이 경주 계림지역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무대입니다.

이미 남북국시대에 수십만명이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도 삼경의 하나로 명성을 유지한 도시입니다. 고려 휴가에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난후 3경에서 제외되고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화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다시 동경으로 복권되어 고려시대에서는 중요한 도시로 기능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전의 위상을 줄곧 유지하였습니다. 경상도의 ‘경’자가 경주에서 따온 것이라하고, 경주부의 수장인 부윤은 종2품으로 관찰사와 같은 급이었습니다. 현대에서 보면 광역시급의 지위를 유지할 정도로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언적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및 옥산서원 등 안동시와 함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고 양반 도시였습니다. 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랜 세월동안 주요 도시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문화유적이 많다는 특성으로 인해 시가지 개발과 항만 조성이 어려워 발전이 미흡해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웃 도시인 포항시와 울산광역시가 이를 대신하여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가 소재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발전이 느려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황상 구석기 시대부터 경주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나 실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흔적은 황성동, 내남면에서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많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8세기경으로 지석묘를 통해 이를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초기 신라 사로국의 세력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기원전 3세기말에서 2세기초에 서북한 일대의 고조선계 집단이 들어와 자리하고, 기원전 2세기말에서 1세기에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초기 철기를 보유한 집단이 외부에서 들어왔습니다.

추정하건데 전자는 고조선이 연나라에 패배해 요동에서 평양 일대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을 때 발생한 피난민 집단으로 보입니다. 후자는 위만의 찬탈 당시 위만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한씨 조선인들 및 위만조선이 망한 후 내려온 위만조선인들로 추정됩니다.

2세기 중반에는 다시 낙랑계 조선인들이 내려와 주도 집단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조선 유민들이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들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6촌에 속하였고, 6촌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가 건국되었습니다.

천년 신라의 수도로 왕경 일대가 서라벌, 금성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서라벌은 삼국통일전쟁 기간을 거쳐 통일신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인들이 가장 많이 섞여서 살게된 도시입니다. 보덕국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구려인을 서라벌에 정착시켰고,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도 많은 백제인을 서라벌에 정착시켰습니다.

삼국 출신으로 구성된 중앙군 9서당을 서라벌에 설치하여 구삼국의 인력들을 수도 방어에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다른 통일신라 지방민으로 편입된 고구려인, 백제인과 달리 고구려와 백제의 정체성을 잃고 순탄하게 신라인으로 동화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비화현, 모혜현, 동잉음현은 각각 인강현, 기계현, 신광현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러나 견훤의 서라벌 함락으로 큰 상처를 입은 후 점차 쇠퇴하였습니다. 견훤은 서라벌 점령 후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경주 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전 터 입니다. 신라 왕이 기거했던 궁궐이자 성이기도 합니다. 자연 지형에 흙벽을 쌓아 보강해 만들어진 토성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남천을 천연의 해자로 만들고 다른 면에만 해자를 둘렀습니다.

월성의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습니다. 지금 월성과 동궁 사이에는 원화로라는 도로가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궁으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남동쪽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건설할때에 이후에도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남궁이 있던 자리에 박물관을 세운 것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경주의 문화유산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를 접속하여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주의 거리들은 신라 왕조의 화려함에 대한 증거로서 왕궁과 대저택의 잔재들이 서 있는 장엄한 과거로의 길입니다. 경주 국립 박물관은 신라 시대에 걸쳐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여러분을 시간을 통해 실어 나르는 보물창고입니다. 섬세한 금관부터 복잡하게 장식된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이 유물들은 고대 한국의 장인정신과 예술성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장소들 중 하나인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왕과 왕비들에 대한 고요한 헌사로 서 있는 왕릉들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탑과 정자들의 반사가 왕의 화려함에 대한 이야기들을 속삭이는 천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안압지 연못의 드넓은 땅을 헤매지 않고 경주를 방문하는 것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 왕족의 잔재들은 경외심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화려함과 웅장함의 시대에 대한 유형적인 연관성을 제공합니다.

평온의 사원

성지: 경주의 경건한 절에 빠져드는 것

경주는 신라의 역사와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하여 수도를 천도한 것과 달리 경주는 신라의 천년역사와 함께 하였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한동안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신라시대부터 도시 계획에 의해 도로와 주택들이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아래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여의 영원한 매력 공개 – 한국의 심장부에 숨겨진 보석




경주 월성의 북쪽에는 별궁인 임해전이 있고 그 동쪽으로는 황룡사가 있습니다. 임해전의 바로 옆에는 안압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가 기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황룡사의 바로 위로는 분황사가 있고, 월성 남쪽 강 건너에는 인용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조선시대 영남 남인의 구심지로 불교 유산과 유교 유산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주요 불교 유산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 분황사, 불국사, 석굴암, 토함산, 첨성대, 대릉원, 남산, 동궁과 월지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입장료가 있었으나 2023년 5월부터 무료 입장으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주요 유교 유산으로는 안강, 강동의 양동마을, 옥산서원, 독락당, 교동 최부자댁, 경주 월암종택, 이요당이 있습니다.

주요 불교 유산과 유교 유산을 순서대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분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입니다. 황룡사지나 감은사지처럼 분황사도 석탑이 유명하나 분황사지 석탑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 전성기때보다는 작아졌어도 유적지가 아니라 현존하는 사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아도의 비문에는 칠처가람지허 중 용궁북이었다고 합니다. 분황사의 상징은 모전석탑입니다. 전탑 모양을 흉내낸 석탑으로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탑입니다.

불국사는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신라 연간을 기원으로 하는 사찰이고,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입니다. 불국사는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통일신라의 꿈을 드러낸 건축물로, 불국사라는 이름도 불국정토에서 유래한 호국 사찰입니다.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합니다.

불국사는 전성기였던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8배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세월을 거치며 파괴되고 복원되는 과정에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오늘날의 불국사는 조선 영조때 복원된 불국사입니다.

불국사의 건축 연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15년에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이 불국사를 처음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크게 개창했는데 이때 아미타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문무왕 10년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고, 경덕왕 10년에는 김대성이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앞부분이 없고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굴암을 만들었고 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큰 규모의 불국사를 김대성 혼자 건설했다기보다 법흥왕때부터 신라 국가차원에서 개증축을 해왔는데, 결정적인 중수를 김대성이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불국사는 크게 불타 사라졌습니다. 현재의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보면 당시 화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후 조선 영조 26년에 불국사 극락전이 다시 세워지고 41년에 불국사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재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조선 말기를 거치며 사실상 폐허로 변하였습니다.

이후 일제시대에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다보탑의 석물과 사리함 등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여러 건물이 소실되었습니다. 일본은 불국사의 유적들을 보수공사를 핑계로 약탈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가 임시로 복원한 상태로 유지되었다가 해방후 1970년에 와서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복원되 않은 부분들로 인해 비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교 문화유적으로 옥산 서원이 있습니다.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이언적을 주향하는 서원입니다.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본산이고,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주는 문화 유산입니다.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2019년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다시 재등재되기도 하였습니다.

양동마을은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양반 집성촌입니다. 조선 전기부터는 유교적 종법 질서가 확립되면서 장자 상속을 기반으로 같은 성씨의 부계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생기게 됩니다.

양동마을은 조선전기 후 처가입향으로 마지막으로 들어온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양성의 마을입니다. 경주 손씨와 경주 이씨의 마을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경주 이씨가 아니라 여주 이씨라고 합니다. 이들은 유교적 종법질서를 추앙하고 국가적 명성을 얻는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씨족 마을의 가장 오래된 사례이기도 합니다.

양동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어른 4천원, 어린이 1500원이고, 자전거나 반려동물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매표소에서 탐방로 안내도를 나누어 주는데 전부 돌아보려면 반나절이 부족할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궁전의 화려함 너머에, 경주의 정신적인 성지들은 성찰과 숙고를 위한 고요한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불국사는 불교 건축과 디자인의 걸작으로 서 있습니다. 탑, 다리, 그리고 석등의 복잡한 세부사항들은 그것의 장인들의 헌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근처에, 석굴암은 고요한 지혜의 감각을 내뿜는 놀라운 화강암 부처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원들을 탐험하면서, 여러분은 수세기 동안 여기에서 번창해온 정신적인 수행에 대한 연결을 느낄 것입니다. 주변의 고요함 속에서, 여러분은 위안의 순간과 오늘날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영원한 가르침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주의 사원들은 그것의 정신적인 역사에 대한 엿보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찰과 내적인 평화를 위한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문화적 반향

경주의 전통과 축제를 품은 살아있는 유산

이 도시의 독특한 축제로 동리목월 문화재가 있습니다.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해방후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웅혼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에 바탕을 둔 문학 세계를 펼친 작가입니다.

박목월은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청록파 시인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자연을 보는 입장에서 후기에는 사회현실을 인식하는 입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들 두분을 기리기 위해 동리목월 기념 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문학관을 건립하고 이들을 위한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는 찬란한 빛의 신라, 경주타워 천년대게 등 천년 경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엑스포대공원에는 아사달을 기리기 위한 아사달조각공원도 있습니다.

과거 황남 큰길로 불리던 황리단길에는 전통한옥 스타일의 카페와 식당, 사진관 등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황남동과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합친 단어로 황리단길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황남상가시장축제가 열리기도 합니다.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통과 축제가 현재를 물들이는 살아있는 캔버스입니다. 활기찬 석동 김치 문화 축제는 여러분이 세대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요리 전통인 김치 담그는 예술에 여러분 자신을 몰입하게 하는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합니다. 벚꽃 축제 동안, 그 도시의 거리들과 공원들은 지역 주민들과 방문객들을 모두 사로잡는 숨막히는 장관을 만들면서, 섬세한 분홍색 꽃들의 바다로 변합니다. 이러한 기념 행사들은 경주의 지속되는 관련성을 반영하는 조화로운 태피스트리를 만들기 위해 오래된 관습들이 현대의 기념 행사들과 합쳐진 그 도시의 역동적인 정신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활기찬 행사들에 참가함으로써, 여러분은 경주의 살아있는 유산을 목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계속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경주의 영원한 포옹

왕과 수도승, 장인과 순례자들의 이야기가 서로 얽혀 고대적이고 활기찬 도시를 형성하는 수세기에 걸친 항해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사찰에 여러분 자신을 몰입하고, 그것의 문화적인 축제들에 참가하면서, 여러분은 경주가 단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살아있는 유산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영원한 도시로의 여러분의 여행을 계획하고 그것의 아름다움, 그것의 역사, 그리고 시간을 통해 여러분을 이동시키는 그것의 능력에 사로잡힐 준비를 하세요. 여러분이 그것의 고대 거리들에 작별을 고하면서, 여러분은 당신의 마음에 앞으로 몇 년 동안 남아있을 가슴에 각인을 남기면서,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과거의 울림을 여러분과 함께 가지고 갈 것입니다. 경주의 포옹은 시간을 초월하고, 그것의 매력은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을 계속해서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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