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비원 예약 예매 야간개장





서울 중심부에 우아하게 자리 잡은 창덕궁은 시대를 초월한 분위기로 손짓하며 한국의 풍부한 역사적 태피스트리와 지속되는 문화적 유산에 매혹적인 입구를 제공합니다. 그것의 복잡한 건축적 경이로움, 무성하고 매혹적인 정원들, 심오한 역사적인 의미가 합쳐져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을 만듭니다.

창덕궁 사진

창덕궁의 공개된 건축 마블





디자인의 우아함 탐구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습니다. 후원에는 160여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충실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본 궁궐은 한양 5대궁궐 중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경복궁의 대부분 전각들은 19세기에 새로 지은것이고,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대다수를 허물었다가 광복 이후 새로 복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형이라서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지켜며 지어진 궁입니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된 궁입니다.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기도 합니다. 이는 궁궐이 위치한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도록 하기 위함이며, 궁의 남쪽에 있는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지 않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치는 동양의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감한 궁궐의 배치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종 1년에는 상왕 태종이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며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이 때문에 측량을 게을리했다는 명목으로 박자청을 하옥시키고 상량까지 끝난 행각을 부수라 명한뒤 그 곳에는 담만 쌓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한달후 박자청은 풀려나 이후로도 공사를 맡았고 끝내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으로 행각을 완공하였습니다. 즉, 궁궐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달설한 의도된 설계입니다.

창덕궁의 아름다움 중 하이라이트는 궁 북쪽의 정원인 후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 정원의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으나 그 외에도 금원, 북원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금원은 아무나 드나들수 없는 정원이라는 뜻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의미의 비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세가 있는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정원을 비원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관련 문건에도 후원을 칭하는 명칭은 비원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비원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은 인원을 제한하여 관람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기다릴수도 있지만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후원 예매를 위한 링크는 아래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창덕궁의 건축적인 경이로움들은 그들의 복잡한 세부사항들과 뛰어난 장인정신으로 상상력을 사로잡습니다. 왕실 의식의 증인인 상징적인 인정전은 관심을 명령하는 웅장함을 내뿜습니다. 궁전의 숨겨진 보석인 비밀의 정원은 정자들, 연꽃으로 장식된 연못들, 그리고 푸르른 풍경들의 친밀한 영역을 제공하며, 인간의 독창성을 자연의 세계와 매끄럽게 통합시킵니다. 궁전의 대칭적인 배치는 균형과 미학에 대한 왕조의 깊은 존경에 경의를 표하며,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증거로서 서 있는 건축적인 경이로움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매력은 건축물 자체를 넘어, 건축 예술성과 주변 환경 사이의 섬세한 춤에 있습니다. 궁전의 마당의 각 모서리는 방문객들을 화려함과 우아함의 시대로 이동시키면서, 조화로운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창덕궁 왕실 생활의 일견





역사의 회랑 횡단

창덕궁은 조선 5대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본 궁은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입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였기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린 후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시작하였으며 광해군 2년에 중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궁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다시 불에 타게 됩니다. 인조 25년에 복구되었으나 그 후에도 그고 작은 화재가 수차례 반복되었습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내 교태전, 강녕전, 동서행각 건물이 해체되어 복구에 사용되었습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동안 조선의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입니다.

경복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아래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경복궁-한국의 풍부한 문화 유산을 통해 시간을 초월한 오디세이 여행

태조는 건국 3년차에 한양으로 천도하여 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그 후 1차 왕자의 난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습니다.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양 재천도를 위한 작업으로 향교동에 이궁 건설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에 완공했습니다. 이렇게 이궁된 궁이 바로 창덕궁입니다. 이후 조선시대 임금들은 양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 거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1405년 창건 당시 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의 규모로 기본적인 기능을 갖춘 정도였습니다. 완공 후에도 궁의 증축 공사를 계속하여 정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공사를 계속하면 백성이 힘들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태종은 이름 감수하고 공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세종이 직위하고 난 후 까지 공사는 지속되었는데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지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세종의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므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이후 조선 전기 여러 왕들은 다시 궁을 애용하였습니다. 세종이후 단종 대에 인정전과 그 일대를 다시 한번 증개축하였으며,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하였습니다. 세조를 거치며 궁 후원의 규모는 태종때에 비해 3배나 더 커졌습니다. 성종 때에는 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가 한성을 떠나며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에 탔습니다. 왜군에 의해 궁들이 불에 탔는지 백성들이 불을 지른것인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선조 26년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하였습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하고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였습니다. 대신 창덕궁 중건을 우선하도록 결정하면서 선조 38년부터 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선조때 시작된 궁의 중건 공사는 광해군 1년에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건 후 광해군은 바로 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2년에서야 궁으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 폐허가 되었던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복궁과 함께 범들이 낮에 은거하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창덕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으나 경복궁은 흥선대원권이 집권하여 재건하기까지 270년이상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인조 반정때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창경궁은 무사하였으나 다음 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전소되는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인조 치세의 궁궐의 중건 공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인조 25년에서야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친 궁궐 공사로 백성들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새 궁전을 이용하며 주로 경희궁에 거처하였습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대신들은 반정의 명분을 위해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습니다. 인경궁의 처리와 창덕궁, 창경궁의 중건을 두고 조정에서 오랜 정쟁이 있었으나 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엮인 저주사건이 발생한 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고 남은 전각도 모두 헐었습니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으로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왕의 거처로 쓰인 궁궐입니다. 이후 순조때 대화재로 궁의 대부분이 다시 한번 전소되었습니다. 대화재 이전의 궁의 건물은 인경궁을 헐어서 중건한 것으로 청기와 건물이 많고 화려했으나, 대화재이후 선정전을 제외하고 청기와 건물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존경 받는 조선 왕조의 경이로운 창덕궁은 한국의 왕족의 삶을 독특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합니다. 건축적인 우수성의 증거인 궁은 주변의 풍경과 매끄럽게 통합되며, 구조물과 자연적인 에너지의 흐름이 조화를 이루는 고대의 철학인 “풍수”를 구현합니다. 위엄 있는 돈화문 문에 의해 환영을 받는 방문객들은 우아하고 권위 있는 시대로 이송되어 발견으로 가득 찬 여행을 위한 무대를 마련합니다. 궁궐 안의 각 단계는 역사적인 의식을 목격한 왕좌의 전각의 웅장함으로부터 일상의 궁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이는 친밀한 공간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시간의 기록에 걸쳐 있는 문화 유산과 건축적 풍요의 성지입니다.

궁궐 벽 안의 자연의 포용





도시 생활 속에서 평온함을 발견하다

창덕궁은 한양 5대 궁궐 중 가장 원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궁궐로 평가됩니다. 이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꼽아야 한다는 의견도 종종 나오기도 합니다. 경복궁의 대부분 전각들은 광복 이후에 복원한 것들이 많은 것에 비해,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형이라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 창경궁, 종묘가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로 인식하여 두 궁을 합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종묘의 경우 제례 공간으로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나온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본 궁궐은 과거에는 전체 구역이 시간제 관람으로 진행되었다가 2010년부터 후원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면 자유 관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궁궐전각의 입장료는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 대인 3,000원 입니다. 내국인은 만 24세이하, 만 64세 이상이면 무료이고, 외국인은 만 18세이하, 만 65세 이상 무료 입장입니다. 한복을 착용하면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야간개장으로 달빛기행이 상반기와 하반기에 있으므로 야경을 즐겨볼 수도 있습니다. 후원은 특별 관람 예약을 해야 하며 예약은 시간당 50명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현장 판매도 시간당 50명씩 이루어지고 있어, 총 관람은 시간당 100명씩 입니다.

단풍철인 11월은 후원 관람의 최고 성수기에 해당합니다. 이 주변 일대는 서울에서도 가능 늦은 시기까지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1월 초중순이 북한산, 관악산의 단풍 절정기라면 창덕궁은 11월 중하순이 되어서야 단풍 절정이 됩니다. 이에 비해 여름철에는 송충이 시체와 벌레가 많아 관람이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후원의 관람은 시간마다 해설사를 동행하여 입장이 가능하며 관람 시간은 약 2시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후원의 출입이 통제된 만큼 자연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후원 관람시 음식물 반입은 전면 금지되며 간단한 음료정도만 허용됩니다.

궁에서는 길고양이들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역사에 따르면 이 궁에 사는 고양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숙종 재위 당시 숙종 임금은 궁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거두어 금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금덕과 새끼인 금손이는 대를 이어가며 숙종과 지냈다고 합니다. 특히 금덕이 새끼인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창덕궁의 독특한 매력은 자연과의 완벽한 통합에서 비롯됩니다. 궁궐의 뒷 정원인 후원은 한국 정원 디자인의 본질을 구현하여 평온함과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세심하게 다듬어진 풍경을 제공합니다. 반사되는 연못 위에 우아하게 배치된 우아한 부용정은 수 세대의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경치를 제공합니다. 정원의 고요함은 도시의 분주함으로부터 환영 받는 휴식을 제공하여 방문객들이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도록 장려합니다. 자연을 건축적인 구조로 조화롭게 엮어내는 궁전의 능력은 도시의 혼돈 속에서 고요한 오아시스로 탈바꿈시켜 성찰의 공간과 역사와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제공합니다.

여왕의 살아있는 태피스트리




창덕궁은 한국의 찬란한 과거, 건축적인 우수성, 그리고 인류와 자연 사이의 지속되는 조화에 대한 살아있는 헌사로서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매혹적인 성역에 작별을 고할 때, 역사적인 이야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들, 그리고 고요한 정원들의 메아리가 여러분에게 한국의 문화 유산을 더 깊이 탐구하도록 손짓합니다. 창덕궁의 매력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한국의 문화적인 뿌리와 이야기들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 역사적인 장소로의 여러분의 순례를 계획하면, 여러분은 단순히 왕궁을 탐험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울 수 없이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현장에서 관람할 수 있나요?

네, 현장에서 대기하여 관람할 수도 있지만, 온라인으로 예매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창덕궁의 후원과 비원은 어떻게 달라요?

네, 명칭만 다르고 같은 곳입니다.
과거에는 비밀의 정원이라는 의미로 비원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

지금까지 창덕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 도심 여행 중에도 갈증은 피할 수 없죠.
휴대하기 좋은 대용량 텀블러 하나로 편하게 다녔습니다.

https://link.coupang.com/a/cMouQg

북촌 한옥마을에 대해 궁금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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